그때에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
제가 머물고 있는 수녀원에서 눈여겨 보게 된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쓰레기통이었습니다.
보통 쓰레기통을 비울 때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통 안에 비닐을 씌워두죠. 이 비닐을 아끼려고 다른 물건을 담았던 비닐을 쓰곤 합니다.
그런데 이 곳 수녀님들은 이 비닐조차도 안 쓰시더라고요. 신문지를 이리저리 접어서 비닐 모양으로 만들어서 쓰레기통에 씌워 놓으시더군요. 비닐은 땅에 묻혀도 오랫동안 썩지 않으니, 가능한 한 비닐을 안 쓰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근데 솔직히, 수녀님들이 비닐 몇 장 안 쓰신다고 환경보호에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수녀원 밖의 세상은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비닐을 버리고 있고 쓰레기를 태우고 묻고 있습니다. 이것에 비하면 수녀님들이 애쓰시는 것은 정말 수억분의 일도 안 될 겁니다.
그런데 이런 계산은 저같은 속물들이나 하는 것이지, 수녀님들은 그런 계산을 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는 판단의 기준이 아니신 것입니다. 올바른 일이라면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는 것. 이 단순함이 수녀님들의 판단 기준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습니다.
부러진 갈대는 꺾고, 연기나는 심지는 끄는게 당연한 일입니다. 다들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갈대가 부러졌더라도 살아 있으면 꺾지 않는 것, 불이 꺼져 연기가 나도 불씨가 살아있다면 심지를 끄지 않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판단 기준이고 예수님의 행동이었습니다.
‘죽었으니 끝났지.’, ‘저 정도 병은 이미 늦었을거다.’ 라고 생각했으면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기적은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르 5,39),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요한 11,4) 라고 말씀하시며 갈대를 꺾지 않고 심지를 끄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끝까지 희망을 가지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해도 그분의 희망을 뺏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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