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학교에서 사목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던 적이 있습니다. 수업을 하던 중에 학생들을 좀 참여시켜 보려고, 학생들을 불러서 칠판에 뭘 그려보게 했었습니다.
이 시기에 독일 학생 한 명이 교환 학생으로 와 있었습니다. 이 학생이 있는 반에서 수업을 할 때 호기심이 생겨서, ‘독일 학생도 한 번 시켜 볼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OOO야, 앞에 나와서 이것 이것 한 번 그려볼래?” 라고 물어봤습니다.
그 때 그 학생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Why?” 라고 하더군요.
순간 갑자기 ‘욱!’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게… 선생님이 지시하는데 ‘왜요?’라고? 어디 버르장머리 없이, 선생님이 시키면 바리바리 해야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는 멋진 선생 쿨한 선생이지. 이 정도 쯤이야…’하며 참았습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왜냐하면, 네가 칠판에 그림을 그려주면 수업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라고 설명했습니다. 그제서야 그 학생은 앞으로 나와서 제 지시에 따랐습니다.
평소에 저는 학생들에게 ‘왜?’라는 질문을 자주하라고 말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책에서 보는 것이 모두 정답인 것은 아니다, 그것이 정말 옳은지 그른지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랬던 제가 정작 ‘왜?’라고 묻는 학생을 보고 욱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제 모습이 한편 무서웠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 말씀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관습에 저도 모르게 푹 젖어 있었던 것이죠.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선생님께 복종해야 했던 학교를 십수년간 다녔기 때문에 그 관성이 저에게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주 수업 시간에 그 학생을 다시 만났습니다. “지난 주에 네가 ‘why?’ 라고 했을 때 사실 많이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why?”)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의심스러운 것을 질문하는 것에 그다지 관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궁금한 것도 많고 의심스러운 것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냥 믿어라.’, ‘그건 믿는 거지 이해하는 게 아니다.’ 라는 말로 막혔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토마스 사도는 ‘의심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곧 ‘믿지 않는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 됐습니다.
그런데 과연 ‘의심’이 그렇게 부정적이기만 한가 생각해 봅니다.
관심이 있어야 의심도 합니다. 더 알고 싶어야 의심을 합니다. 더 확실하게 이해하고 싶을 때 의심을 합니다. 긍정적인 의심은 그 대상을 향한 믿음과 신뢰를 더 깊게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의심의 사도’인 동시에 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뜨겁게 고백한 유일한 사도였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호한 것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신학은 어려운 학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가 완전히 안 돼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너무 쉽게 놓아버리지는 맙시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좋은 설명을 찾을 수도 있고, 신앙의 이해를 돕는 책들도 많이 있습니다.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합리적인 답을 얻게 되면 내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하느님에 대해, 신앙과 종교에 대해 치열하게 의심하고 고민하는 이 시대의 ‘토마스 사도’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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