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
저는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제 허물 또한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괜찮고 좋고 잘 살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이런 자의식과 ‘신부’ 라는 자리가 더해져서, 신자들에게 하는 강론도 ‘이렇게 하시라, 저렇게 하시라.’ 하는 권유 혹은 명령으로 끝맺음을 했습니다.
나이가 좀 들면서 저의 허물을 조금씩 깨닫게 됐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저렇게 하시라.’ 라고 강론을 하고 나면, 제 마음 속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배우 이영애씨가 시니컬한 표정으로 했던 그 말.
‘너나 잘 하세요.’
나도 못 하는데, 나도 안 하는데 신자분들에게는 하라고 말하는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나이는 더 먹고 내 허물은 더 크게 보이는 것과 함께, 이 부끄러움도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복음 묵상글을 쓰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하시라.’ 라고 끝맺음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게 됩니다. 주어를 ‘나’로 두어서 내가 ‘이렇게 한다.’ 혹은 ‘이렇게 하겠다.’로 마무리 하곤 합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권유 혹은 명령형 끝맺음이 자꾸 나오게 되어서, ‘너나 잘 하세요’를 되뇌이며 몇 번을 다시 고쳐쓰곤 합니다.
이제 불혹(不惑)의 나이를 몇 해 넘기니, 자기 부끄러운 줄은 알게 되어 다행이다 싶습니다만, 오늘 복음을 보니 아직 멀었구나 생각됩니다. 여전히 저는 눈이 멀어 있고 또 눈에 큰 들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내 허물 보다는 남의 허물을 더 자주 지적하면서, 꼴랑 책 몇 권 좀 읽었다고 그걸로 유식하게 허물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음… 역시 나는 저들과 달라!’ 하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저의 행동은 모르고 저의 말만 강론으로 들었던 신자들은 ‘아이고, 강론 좋습니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를 빤히 알고 있는 하느님 앞에 서게 되면 얼마나 부끄러울까 벌써 걱정입니다.
벌써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라는 말씀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복음묵상 -2020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 묵상 - 2020.09.13 가해 연중 제24주일 (마태 18,21-35) (0) | 2020.09.12 |
---|---|
복음 묵상 - 2020.09.12 가해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루카 6,43-49) (0) | 2020.09.11 |
복음 묵상 - 2020.09.10 가해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루카 6,27-38) (0) | 2020.09.09 |
복음 묵상 - 2020.09.09 가해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루카 6,20-26) (0) | 2020.09.08 |
복음 묵상 - 2020.09.08 가해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마태 1,18-23) (0) | 2020.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