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
성경聖經은 글자 그대로 '거룩한 경전' 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을 받들어 모시는 마음으로 읽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현실적인 면을 놓치고 읽는 경우가 있는데요, 예수님의 수난 장면을 읽을 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거룩함 뒤에 가려진 현실적인 참담함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은 아닌가... 오늘 복음 말씀도 비극적이고 비참한 장면을 너무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글이라고 생각하고 건조하게 읽어보면 짧은 텍스트 안에 우울하고 슬픈 내용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우선 죽음의 순간이 너무 비인간적입니다. 십자가형은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사형 방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혀 매달려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고통입니다. 매달린 사람은 점점 힘이 빠져서 몸이 축 늘어지고, 그러면서 숨이 천천히 끊어지면서 질식사로 죽게 됩니다. 보통 3일 동안 고통을 당하다가 사망한다고 합니다. 그 시간 동안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형당한 시신이라도 최소한 인간적인 마무리를 해 주는게 도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후의 모습도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죄수를 그냥 매달아 놓으면 죽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형리들은 형 집행을 빨리 끝내려고, 죄수의 다리를 부러트려서 몸이 완전히 처지게 해서 바로 질식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그것보다 더 잔인하게 그냥 창으로 시신을 찔러버립니다. 시신에 대한 큰 훼손이고 모욕입니다.
게다가 이 비극이 당사자에게만 비극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죄수인 아들의 사형 장면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자기자신의 죽음보다 더 아프고 괴로운 것이 자식의 죽음입니다. 자식의 죽음을 먼저 보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인데, 그냥 죽는 것도 아니라 사형 선고를 받고 죽는 아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 어머니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요.
오늘 복음의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하면서,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좋아하고 따라다녔다 하더라도, 저런 끔찍한 장면을 보면 예수고 뭐고 당장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내가 믿던 사람이 저런 꼴을 당하고, 나도 같은 꼴을 당할 수 있는 마당에 무슨 좋은 생각이 들겠습니까? 오히려 ‘나는 저 꼴 안 당하니 다행이다, 험한 꼴 당하기 전에 그만두자, 다시는 여기 발을 들이지 말자.’ 했을 겁니다. 도망간 제자들이 나쁘고 나약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평범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편을 들어봅니다.
만약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난다면, 예수님 제자들의 공동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도 여기서 끝이 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 되는 불씨를 남기셨습니다. 바로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제자를 맡기시고, 사랑하는 제자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예전에 예수님은 ‘둘이나 셋이 있는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 이 두 분만 함께 있어도 그곳은 예수님이 함께 계신 ‘예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성모님과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 후에, 다시 제자들을 모아 예수님을 기억하며 빵을 나누는 ‘예수 공동체’를 계속 이어나가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 입니다. 이 모임, 즉 교회가 바로 오늘 복음에서처럼 성모님을 통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교회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성모님을 기억하는 날로 보내고 있습니다.
나는 이 교회의 일원으로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작이 되신 성모님을 생각하면서, 나는 어떤 역할로 이 교회의 벽돌 한 장이 될 지, 어떤 말과 행동으로 교회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을지 묵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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